[2회] 백범 김구, 독선적 민족주의자 그리고 이상적 민주주의자 : 비국정교과서

By 2018년 3월 11일MANUSCRIPT

김구: 어제와 내일,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양면성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방송 주제로는 백범 김구를 잡았는데요, 사실 김구라는 인물은 좀 특수한 인물이죠. 해방 정국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이기도 했고, 사실상 그 영향력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부가 이승만이네, 김구네, 김구는 테러리스트다, 뭐 이런 발언들이 지속적으로 이슈가 되는 것 역시 그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김구는 죽었지만, 김구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영향력은 살아있다는 거죠. 실제로 김구는 일종의 정치적인 아이콘으로 작동하기도 하죠. 10만원권 지폐에서의 김구 이승만 논쟁이 가장 전형적인 사례인 것 같네요.

 

그런데 김구라는 인물은 한 마디로 단정하기가 너무 힘든 인물입니다. 이런저런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고, 이런 특징들은 가끔 자기모순적인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김구의 극단적인 두 모습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첫 번째는 ‘민족주의자 김구’고, 두 번째는 ‘민주주의자 김구’입니다. 두 모습은 어떻게 보면 비슷하지만, 어떻게 보면 완전히 반대되는 특징입니다.

 

민족주의자 김구의 이야기부터 해 볼까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김구를 ‘민족주의자’라는 말로 평가하죠. 실제로 그는 삶의 많은 기간 동안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민족이라는 이름을 들고 싸운 것만 수십 년이었죠. 그의 삶을 한 번 따라가 봅시다.

 

김구가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1919년부터의 일입니다. 그 이전에 그는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기도 했고,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려서 감옥을 드나들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 중에는 일제에 항거한 사건들도 있었지만, 그냥 단순한 살인이나 폭력 사건도 있었죠. 사실 1919년 이전 김구의 활동 경력도 화려하긴 합니다. 이미 1890년대 말부터 일제가 직접 <김구>라는 제목의 책자를 만들어서 그의 행적을 샅샅이 조사하고 있었다고 하니까요. 또 어린 시절의 동학농민운동, 의병 참여, 그러다가 서구 문명에 눈뜨면서 개화파로의 사상 변경 등의 과정을 보면, 구한말 조선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기도 합니다. 그 혼란했던 시기를 적극적으로 살았던 인간의 전형이랄까요.

 

1910년 한일합방 이후 그는 이제까지의 활동을 접고,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 농촌 계몽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렇죠, 1910년 한일합방 직후엔 많은 독립운동가가 활동을 그만둡니다. 김구도 마찬가지였던 거죠. 하지만 그의 생각을 바꾸어놓은 계기가 3.1운동이었습니다.

 

그가 상해로 넘어간 것은 1919년 3월의 일입니다. 3.1운동 직후의 일이었죠. 흔히 제가 이맘때의 상해를 가지고 ‘독립운동의 핫플레이스’라고 하는데, 실제로 그랬어요. 상해에 우리 교민 500명이 있었는데, 약간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다 독립운동가들이었습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상해로 건너가는 것으로 경력을 시작했죠. 김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 김구는 처음 상해 임시정부를 만드는 데 참여하고 경무국장 자리를 맡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해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개편됐구요. 하지만 임시정부는 이름만 정부일 뿐 제대로 된 구실을 하지 못했습니다. 내부 지도자 사이의 갈등도 극심했죠. 특히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사이의 갈등이 심했는데, 김구는 민족주의 진영에서 앞장서서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했죠. 제3국의 의견만을 따르는 줏대 없는 사람이라던가, 레닌의 말만을 옳다고 여기는 극단주의자들이라고 비판했죠.

 

일단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김구는 민족주의자였고, 같은 독립운동가를 비판했다는 점은 의아하지만 의견이 다르면 얼마든지 비판을 할 수 있죠. 똑같이 사회주의자들도 김구를 비판했을 거구요. 이 정도의 갈등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죠. 그런데 그냥 비판만 한 게 아니었습니다. 임시정부의 사회주의 계파들이 소련으로 건너가 레닌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받아온 일이 있었는데,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이 돈을 임정으로 가져오지 않고, 연해주 쪽 사회주의 단체에 풀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김구는 이들 일파를 추적해 암살했고, 사회주의 일파를 임정에서 추방시켜 버립니다. 좀 과한 것 같기는 하지만, 일단 이건 사회주의자들이 잘못한 거니 넘어가기로 합시다.

 

그 외에도 김구는 사회주의에 대한 과도할 정도의 기피가 있었어요. 사실 정확히 말하면 민족주의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회주의자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총리를 맡았던 이동휘와의 대화에서 이게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김구가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데 코민테른, (세계의 공산주의 지도 기구죠)의 지휘나 명령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공산혁명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이동휘에게 묻습니다. 이동휘가 “불가능하다”고 말하자 김구는 “그렇다면 동조할 수 없다”며 공산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합니다.

 

어쨌든 결국 1923년, 임시정부는 위기를 맞고 ‘국민대표회의’라는 회의가 한 번 소집됩니다. 전 세계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임시정부의 나아갈 방향을 논해보자는 회의였죠. 실제로 이 회의를 위해 미국, 연해주, 만주, 중국, 일본 등 각지에 있던 독립운동가 200여 명이 모였습니다.

 

지지부진한 임시정부를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사람들이 고민에 빠집니다. 결론적으로 도출된 안건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창조파. 임시정부를 깨고 새로운 정부를 만들자는 거였죠. 두 번째는 개조파. 임시정부를 대대적으로 혁신하되 지금의 틀을 유지하자는 거였죠. 김구는 어떤 입장이었을까요? 둘 다 아니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이대로 좋다. 개편도 필요 없다는 입장이었죠. 창조파와 개조파는 모두 사회주의자들에게 농락당한 것이라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쯤 되면 주장이 좀 과격해지죠.

 

결국 창조파와 개조파는 합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결국 김구가 내무총장 자격으로 회의 해산을 선언했고, 모두 임시정부를 떠납니다. 다들 만주로, 연해주로, 미주로, 각자의 근거지로 떠납니다. 임시정부가 텅 비어버렸습니다. 당시 몇몇 사람들이 임시정부를 이끌고 내각을 꾸리려고 했는데, 사람이 없어서 내각을 꾸리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정부 건물 월세를 못 낼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김구의 입지는 자연스럽게 올라갔지요. 임정에 남은 게 김구밖에 없었으니까요.

 

이후 몇 번의 정부 조직 개편이 있었지만, 민족주의자 김구의 또 하나 중요한 분기는 민족유일당 운동이었습니다. 흔히 독립운동의 계파는 두 가지로 나눠요. 첫 번째가 ‘민족주의’ 계열이고, 두 번째가 ‘사회주의’ 계열입니다. 사실 민족주의 자체가 사회주의의 반댓말은 아니죠. 하지만 주로 자본주의-민주주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민족주의를 함께 겸하고 있었던지라, 계파를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구분하곤 합니다.

 

그런데 1930년대 즈음에 이르면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계열이 합작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지게 됩니다. 이때 중국에서도 국공합작이 있었고, 소련 측에서도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합작을 허용한다는 지침을 내리면서 합작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집니다.

 

각종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정당이 모여 난징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이라는 정당이 창당됩니다. 여기에는 김원봉이나 김두봉 같은 사회주의자들도 있었고, 지청천이나 신익희, 김규식 같은 민족주의자들도 있었죠.

 

하지만 김구는 이 민족유일당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주의자들과는 한 당을 꾸릴 수 없다는 거였죠. 사회주의자들이 임시정부를 파괴하려 한다는 과격한 주장도 서슴지 않았죠. 결국 민족주의의 거대한 한 축인 김구가 참여하지 않은 조선민족혁명당은 곧 와해되어버리고, 각종 민족주의 인사들이 탈퇴하면서 사회주의 정당이 되어버리죠.

 

김구는 이때 ‘한국국민당’이라는 정당을 만들고 민족주의 인사를 흡수합니다. 민족유일당 운동이 다시 실패로 돌아간 겁니다. 민족주의 정당과 사회주의 정당이 따로 존재하게 되었죠. 일반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당이 따로 존재하는 거야 문제될 바가 없지만, 이 당시는 정당들 사이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완전히 독립된 단체를 이루고 있다고 봐도 좋아요. 복수정당제의 기초는 정당 간의 협상과 합의잖아요? 그런데 애초에 협상과 합의를 이루려는 노력 자체가 많이 어렵던 시기였습니다. 말하자면 서로 완전히 다른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어요. 결국 김구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분열을 주도한 거라고 볼 수도 있죠. 이후 한국국민당은 한국독립당으로 개편됩니다.

 

이후에는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일본이 중국 본토로 밀고 들어옵니다. 임시정부도 도망 생활을 시작하죠. 내륙으로 들어가길 거듭해 충칭에 정착합니다. 여기서 광복군을 창설하고, 2차 세계대전에 끼어들죠. 이 과정에서 조선민족혁명당 쪽의 김원봉 같은 인사들은 일부 임시정부에 합류하기도 하지만, 잔류 세력도 있었죠. 잔류 세력은 ‘조선독립동맹’이라는 걸 만들어 ‘조선의용군’이라는 군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 상태로 독립이 되어버렸고, 한국광복군은 남쪽으로, 조선의용군은 북쪽으로 들어가면서 양측이 남한과 북한의 정규군에 편입됩니다.

 

김구가 독립운동 과정에서 했던 갖은 노력과 고생을 격하시킬 수는 없습니다. 독립과 제국주의 타도라는 뜻이 올바른 것이기도 했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모습은 독선적인 모습이 강했습니다. 독선적인 민족주의자였죠. 지나치게 독선적이어서 그 과정에서의 고생까지도 혼자 끌어안았던 지도자였죠.

 

그런데 김구에게는 정 반대의 면도 있습니다. 민주주의자 김구의 일면이죠. 주로 해방 이후의 모습에서 많이 드러납니다. 어쩌면 해방 이전과 해방 이후에 대한, 상황 인식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르죠. 해방 이전에는 폭력 투쟁을 했지만 해방 이후에는 폭력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것이 자기모순적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죠.

 

이 시기의 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이 <나의 소원>이라는 글입니다. 첫 부분이 유명하죠.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오,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글이죠. 흔히 알려져 있는 부분은 이 부분까지인데, 사실 이 글은 열 장 정도 되는 긴 글이에요. 이 글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좋아하는 글인데, 방송 들으시는 분들도 한 번쯤 전문을 읽어볼만 합니다. 대단히 잘 정돈된 논리를 차곡차곡 쌓아서 감동을 주는 글이거든요. 물론 이 글에서도 사회주의에 대한 반감이 드러나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이들을 논의의 대상에서조차 배제해버리지는 않습니다.

 

몇 가지 인용을 해 보겠습니다.

 

세계 인류가 너와 나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이상이요 희망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동포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일이나,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여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지 않는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게서 어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나느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미국은 이러한 독재국에 비해서는 심히 통일이 무력한 것 같고 일의 진행이 느린 듯하여도, 결과로 보건대 가장 큰 힘을 발하고 있으니 이것은 그 나라의 민주주의 정치의 효과이다. 무슨 일을 의논할 때에 처음에는 백성들이 저마다 제 의견을 발표해서 통일되지 않고 시끄럽고 하나로 통합되지 않을 것 같지만, 갑론을박으로 서로 토론하는 동안에 의견이 차차 정리되어서 마침내 두어 큰 진영으로 포섭되었다가, 다시 다수결의 방법으로 한 결론에 달하여 국회의 결의가 되고, 원수의 결재를 얻어 법률이 이루어지면, 이에 국민의 의사가 결정되어 요지부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양으로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식이요, 그 내용은 아니다. 즉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 이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다.

 

내용 자체가 좀 놀라울 정도로 민주주의를 잘 이해하고 있죠. 해방 정국이라는 시기는 이 땅에 새로운 국가를 어떻게 세울지를 고민하는 시기죠. 그 새로울 나라를 세울 현실적인 힘을 가지고 있던 시기였구요. 그리고 이런 시기에 민주주의를 이만큼이나 잘 이해하고 있었던 사람이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고무적인 신호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김구는 해방 이후에는 협상과 타협의 지도자였죠. 좌파와 우파의 합의를 이뤄 통일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던 좌우합작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물론 이 운동은 이승만과 사회주의자의 반대, 여운형의 암살로 실패하긴 하지만요. 그리고 그 뒤에는 직접 북쪽으로 올라가 김일성과 협상을 벌이기도 했죠. 뭐 이것 역시 북한의 의지가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쪽에서 5.10 총선거가 벌어지면서 실패로 돌아가긴 했습니다. 해방 정국에서 그는 전 정당을 아우르는 협상주의자였고,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통일 정부 수립을 김구만큼 강력하게 지지했던 지도자는 없습니다.

 

이렇듯 김구는 대단히 양면적인 인물입니다. 우리 교과서가 나오는 2030년쯤에는, 이런 양면성을 정확하게 인식했으면 하는 생각을 해요. 처음에 김구가 지금까지도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정치적 아이콘이라고 했는데, 극단적이고 거칠게 일반화된 정치적 아이콘 자체가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누군가를 한 문장으로 재단하려는 시도 자체가 올바른 것은 아니니까요.

 

2030년쯤에는 독선적 민족주의자와 이상적 민주주의자라는 김구의 두 가지 측면을 모두 바라보고, 민주주의자로서의 김구를 확실히 이해하고 배우게 될 겁니다. 그 양면성이 어떤 지점에서 나타났고, 우리가 그 자기모순의 전철을 밟지 않을 방법을 고민할 수 있겠죠.

 

“해방 전에는 독립운동가, 해방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김구는 당시 정국에서 민주주의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지도자였다. 하지만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사회주의를 배격하고 독선적인 모습을 보인,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독선의 현실을 한번에 보여주는 지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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