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왜곡된 역사는 흐른다, 심일소령 이야기 : 비국정교과서

By 2018년 3월 22일MANUSCRIPT

심일소령의 망령

오늘은 군대이야기

심일 소령이라는 사람 들어봤는지. 심일은 한국전쟁때 6사단 7연대에 복무하던 사람이다. 내가 이 사람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내가 훈련소를 6사단 신교대로 갔기 때문인데, 다른 훈련소에서도 배우는지, 아니면 6사단 훈련소에서만 배우는 건지는 모르겠다. 일설에 따르면 옛날에는 이 사람의 무용담이 교과서에도 실렸다고 한다.

어쨌든 이 사람은 대한민국이 아직 안 망하고 존재하는 이유라고도 불리는 개전 직후 춘천-홍천 지구 전투에서 활약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 사람의 업적은 간단하게 말해서 진격해오는 북한 탱크(자주포라고도 한다)를 상대로 이른바 ‘육탄돌격’을 해서 막아냈다는 거다. 좁은 길을 따라 오는 북한군 자주포 뚜껑을 열고 화염병을 까 넣어서 길을 막고 서있게 만들었다는 거다.

‘1950. 6. 25 춘천 전투에서 6사단 7연대 대전차 포대 2소대장으로 북한군의 탱크형 자주포에 맞서 특공대 5명을 편성해 수류탄과 화염병으로 육탄 돌격, 3대를 격파하는 전공을 거두었다. 그의 영웅적인 행동은 순식간에 전파돼 모든 전선에서 육탄 공격으로 적 전차를 파괴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 6월 27일에는 강원도 춘천 102보충대 앞에 있는 심일공원에서 심일 육탄신화를 재현하는 행사까지 있었다. 이 행사는 2군 사령부가 주체하는 별 4개짜리 행사였다. 2군 예하 부대에서 M48로 추정되는 구형 탱크가 북한군 자주포 역할을 하고 애먼 병사들이 북한군 옷 입고 쓰러져 있고 심일 역 병사가 태극기를 흔드는 뭐 그런 행사였다.

나라에 충성하고, 목숨보다 국가를 소중히 여기는 뭐 그런 장렬한 교훈을 주는 일화를 가진 사람이고, 또 그런 정신을 병사들이 물려받기를 별들은 원하는 뭐 그런 인물이다.

그런데 이 행사에 며칠 앞서서 다른 언론도 아니고 조선일보에서, 그 국가관 투철하다는 조선일보에서 심일 소령의 업적에 대한 상당히 회의적인 기사를 냈다. 심일 소령의 업적이 조작됐다는 것이다.

춘천 전투 당시에 심일소령이 복무했던 7연대 1대대 1중대장이었고 주 베트남 공사를 하기도 한 이대용 예비역 육군 준장이 일종의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이 사람이 묘사한 춘천전투에서 심일소령의 일화는 알려진 것 과는 매우 다르다.

“이렇게 거짓 신화가 만들어질 줄은 그때는 누구도 몰랐다. 춘천 전투에서 심일 소대장은 육탄 돌격이 아니라 도망을 갔다. 나는 바로 위 고지에서 그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중과부적이었다. 하지만 대전차포 1문을 적(敵)에게 넘겨주고 달아난 것은 문제가 됐다. 그의 중대장은 격노해 ‘총살감’이라며 상부에 보고했다.”

라고 증언한다. 심일 소령의 최후에 대해서 기사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심일은 보직 해임됐고, 뒤에 한직(閑職)인 포병 연락장교를 맡았다. 국군이 북진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퇴각할 때는 그 속에 있었다. 1951년 1월 26일 그는 다른 장교 1명, 사병 3명과 함께 묘향산 화전민 움막에 숨어들었다. 하지만 중공군에게 바로 포위됐다. 그는 사병 한 명과 함께 뒷문으로 뛰어나가다 총에 맞아 숨졌다. 그때 28세였다. 다른 세 명은 중공군의 포로가 됐다. 며칠 뒤 이들 중 장교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했다. 그 장교를 통해 심일의 전사(戰死) 사실이 확인됐다.

이런 사람이 어쩌다가 나까지 알고있는 전쟁영웅이 되었을까. 사연은 이렇다고 한다.

심일의 부모가 7연대로 찾아와서, 참고로 심일 소령의 아버지 심기옹씨는 1969년에 5.16 민족상을 수상한 사람이다. 이 5.16 민족상이라는 것은 이름에서 추측이 가능하듯 1966년에 박정희가 만든 상이다. “5.16은 오랜 혼미 속에서 민족의 진로를 옳은 궤도에 올려놓기 위한 진통의 시발이기도 하였습니다” 라고 박정희가 쓴 설립 취지문도 있다.

놀랍게도 이 상은 지금까지도 매년 수상자를 내고 있으며, 이 상을 시상하는 재단의 초대 이사장은 김종필(1926년생)이고, 지금은 명지학원 설립이사 유용근씨(1927년생)가 이사장을 하고 있는데, 역대 이사장중에 가장 어린 사람이 80년대에 역임한 건설부 장관 출신이었던 박기석씨(1928년생)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한 집단이긴 하다.

어쨌든 심일의 부모가 7연대로 찾아와서, 그런데 생각해보면, 전쟁이 한창이고 사람들이 수도 없이 죽어나가는데, 전사자 부모가 찾아와서 심지어 연대장을 만난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보나? 7연대면 용문산 전투에도 참가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해 올라갔던 정예부대다. 이런 부대 지휘관이 죽은 소대장 부모가 왔다고 만나준다고? 전쟁중에? 심일 소령의 아버지 심기옹씨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이 사람은 함경도 단천 출신인데 30년대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기술을 배워서 고향에 돌아왔다. 이런 저런 좋은 일을 많이 했다는데, 일단은 돈을 엄청나게 번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단천에 학교도 세우고 사업도 많이 했나보다.

이러던 사람이 45년 12월에 월남해서 원주에 자리를 잡는다. 전쟁 전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딱히 알아내지는 못했는데 큰아들을 육사에 보내서 개전 직전에 임관시키고, 둘째도 경찰이 되고 한 것으로 봐서는 당시로서는 여건이 괜찮지 않았나 추측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전후에도 원주에서 각종 사업을 벌여서 돈을 꽤 많이 벌었다. 심일 소령의 어머니인 조보배씨도 원주에서 꽤 큰 여관을 운영했다고 한다. 어쨌든 산야를 개간한 공로로 5.16민족상까지 받았으니 딱히 역사의식이 투철하거나, 외침이나 독재에 항거하는 정신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돈이 좀 있고, 생존력이 강하고, 주위에 베풀줄도 아는 사람이었던 게 아닌가 추측은 가능하다.

그러니까, 심일 소령의 부모는 그냥 죽은 소대장의 부모가 아니고, 꽤나 돈이 있고 영향력도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을 해볼 수 있겠다.

어쨌든 심일의 부모가 7연대로 찾아와서 “학도병에 나간 셋째도 생사불명이다” 셋째 심익씨는 1950년에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비 토벌을 했던 경찰 둘째는 죽을 병에 걸렸다” 무슨 죽을병인지는 모르지만 둘째 심민씨는 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인 1960년에 과로사 한다. “이제 막둥이 하나만 남았다”. 심민씨의 막내동생 심승택씨는 잘 살았던 것 같다. 어쨌든 아들 둘을 잃은 이 부모님의 하소연에 연대장이 “훈장 하나 받아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돌려보냈단다.

그런데 위에 언급했다시피, 심일 소령이 생명을 잃은 것은 가슴아픈 일이지만 훈장 추서를 건의하기에는 공훈이 모자랐다. 그러자 연대장이 “야 인마, ‘노몬한 전투(1939년)’식으로 하면 되잖아. 아들을 이렇게 많이 나라에 바쳤는데 훈장을 만들어 줘야지” 라고 호통을 쳤단다.

자, 이런 비슷한 소재 영화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고 할 수 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모티브가 된 사건은 ‘설리번 5형제’ 사건이다. 과달카날 해전에서 침몰한 USS주노에 설리번 5형제가 함께 타고 있다가 모두 사망한 사건이다. 미국은 형제의 같은 부대 복무를 금지하는 제도를 만들었고, 한국은 공훈을 위조해서 훈장을 받아준 거다.

이렇게 훈장을 만들어준 것 까지는 좋았는데, 이 날조된 일화를 국방부 정훈국 장교가 발견해냈고, 전쟁영웅이 궁하던 차에 국방잡지에 소개하면서 일이 커졌다. 이걸 심일을 육사에서 가르쳤던 대령이 보고는 “’노몬한 전투’로 정신교육을 했는데 심일이 그대로 실천했다” 라고 사발을 풀면서 문제는 더 커졌다.

아마 저렇게 이야기를 한 교관은 너무나 당연하게 일본육사나 만주국 육사를 나왔을 거다. 사실 저 부분을 읽고 소름이 돋았다. ‘노몬한 전투’가 뭐길래?

일본군은 “노몬한 사건”이라고 부르고 연합군은 “할힌골 전투”라고 부르는 이 전투는 유럽 관점의 2차세계대전이 개전하기 직전에 일본과 소련 사이에서 벌어졌다. 장동건이 나오는 영화 ‘마이웨이’ 에서 일본측이 대단히 미화되어 표현된 전투이기도 한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련의 완벽한 승리다.

일본은 만주국을 세우고 그 동네를 장악하려고 날뛰고 있었는데, 마침 만주국과 몽골 접경에 있는 할힌골이라는 불모지에 국경분쟁이 생겼다. 문제는 몽골이 뜻밖에 세계 2번째로 성립된 공산주의 국가라는 것이었고, 이 시대에 공산국가라는 것은 곧 소련과 한 편이라는 뜻이었다.

일본이 이 지역을 먹어보겠다고 건드리니까 소련이 일본군을 응징하기 위해 나섰다. 사실 당시의 소련군도 딱히 강한 군대라고 보기는 어려웠는데, 경험이 있는 장군이나 장교들은 대부분 대숙청으로 죽은 상태였고, 소련은 산업구조나 기술력이 다른 서구 열강에 비해 떨어졌던데다 현대전을 수행해본 경험도 당시에는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탈탈 털렸다. 이후에 독소전에 활약하게 될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은 착실하게 일본군을 털어나갔는데, 여기에는 전차나 장갑차 같은 기갑전력이 큰 힘이 됐다. 반면에 일본군은 소련의 기갑부대를 상대할 전력을 갖추지 못했고, 지휘관들은 그런 상황에서 대처 능력도 떨어졌다.

전력으로 안되니까 나왔던 것이 그 지긋지긋한 일본군 특유의 육탄공격이다. 그러니까 자국 병사한테 탱크랑 같이 죽으라는 말이다. 탱크에 달려들어서 폭탄을 붙이거나, 뚜껑을 열고 수류탄을 까거나, 심지어 대전차 총검술 같은 말도 나온다. 탱크에 달려드는 보병은 그냥 죽는 거다. 이건 어떤 전공이나 무용이 아니라 비참한 지옥도다.

일본군의 사상자는 거의 5만명에 달하는 걸로 추정되는데 이는 소련군의 2배다. 소련군도 인명을 경시하기로는 어디에 내놓아도 모자라지 않지만 일본군보다는 나았다. 전투의 분위기는 소련이 곧바로 일본군에 역습을 가해도 될 상황이었지만 할힌골 전투가 끝난 다음날이 하필 유럽에서 2차세계대전이 개전된 날이기 때문에 두 나라는 더이상 싸움을 진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결과가 이런데도 비인간적이기로 유명한 일본군 지도부의 눈에는 자국 군인들의 비참한 죽음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군인과 탱크를 교환하면 Profit!!! 이라는 공식만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일본군은 소련군 전차에 이렇게 대책없이 탈탈 털려서 수만명이 죽었는데도 군 체제 자체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여전히 일본군 탱크는 다른 나라 탱크에 피해를 주지 못하는 수준이었고, 대전차무기도 형편 없었다. 탱크를 만나면 피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육탄돌격하는 것을 교리로 삼았다. 이런 상황은 일제 패망 시점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물론 전투 자체가 비참한 패배였기 때문에 후속조치는 있어야 했는데, 일단 이 전투를 은폐하고 축소했다. 그리고 마치 자국이 승리한 것 처럼 윤색했다. 그리고 그 ‘승리’의 원인을 자국 군인들의 ‘정신력’에서 찾았다. 탱크를 보면 자폭하는 일본 군인들이 승리의 원동력이니 너네도 저렇게 자폭하라는 정신교육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할힌골 전투는 수만명이 죽은 전면전이었지만 일본군 수뇌의 ‘체면’ 때문에 ‘노몬한 사건’으로 축소됐고, 그 체면을 세우기 위해 말단 일본군의 생명은 대전차 무기 수준으로 격하됐다. 일본군은 아무런 교훈도, 개선도 얻지 못했다. 똑같은 방식으로 1945년까지 수백만명의 말단 일본군이 죽었다. 이게 우리나의 독립에 좋은 영향을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전투는 일본이 2차세계대전기 내내 유독 소련에 대해서만은 젠틀했는지를 설명하는 열쇠다. 미국이 소련에 지원한 엄청난양의 군수물자의 반절 이상이 태평양과 동해를 거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들어갔는데, 소련에 지원된 군수물자는 일본의 동맹인 독일과의 전쟁에 쓰였다. 사실 미국의 지원이 독소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을 생각하면 도대체 왜 일본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봉쇄하고 통상파괴를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랬다가는 소련군한테 다 죽겠구나 하는 공포가 이 전투로 생겼던 거다. 바다건너 미국보다 기차 타고 당장 달려올 수 있는 소련이 일본은 더 무서웠을 거다.

정말 무서운 점은 지도부의 체면을 위해 일반 병사의 개죽음이 강요됐던 노몬한식 정신교육은 친일파 출신 초기 한국군 장교들에 의해 우리 군대에 파고들었고, 이렇게 파고든 정신교육이 한국전쟁 서훈 날조를 위해 인용됐고, 그대로 현대 한국군에게까지 파고들었다는 거다. 물론 한국군 교리도 너무 당연하게 보병이 탱크를 만나면 적절한 대전차 수단이 있거나 꼭 필요하지 않다면 피해야 한다는 거지만, 동시에 심일 소령의 육탄돌격을 칭송하는 정신교육도, 적어도 내가 현역이던 시절까지는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제식 무책임과 인명경시 풍조를 함축한 일화가 등장인물이 한국군이 되고, 배경이 한국전이 되는 식으로 번안이 됐을 뿐 80년전과 똑같이 살아있다는 것이 이제서야 밝혀진 거다.

이 이야기를 증언한 이대용 전 공사는 왜 이제서야 바로잡으려 하냐는 물음에 심일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바로잡자고 이야기 했는데, 심일의 모친이 만 100세까지 살고 2005년에야 별세하면서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전우들이 다 먼저 죽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더더욱 소름 돋는 점은 국정교과서 홍보 페이지에서 심일 소령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미래 세대 학생들에게 확고한 국가관과 역사의식을 심어주겠다고 해 놓았단다. 심지어 일본군도 폐기한 구 일본제국의 정신교육 자료를, 우리 미래세대에게 주입시키겠다는 거다. 이건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비단 군대만이 아니다. 우리가 무슨 사건만 터지면 축소하고 덮어놓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서민들만 희생을 강요받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사회 풍조가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볼 문제다.

어쨌든 이대용 공사의 노력으로 진실이 알려졌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20세기 초, 일본의 35년에 달하는 식민통치 기간에 일본식 군국주의가 우리 사회 전반에 스며들었다. 이런 사회 풍조는 광복과 한국 전쟁 이후에도 군대를 비롯한 사회 곳곳에 영향을 주었고 오랜 기간동안 척결되지 못했다. 다만 이런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 역시 꾸준히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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